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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 의한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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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헌철 작성일12-09-29 11:54 조회6,1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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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 의한 순교자들 ‘콘스탄티누스대제’와 동맹하여, 로마 제국을 통일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관용령을 냈으나(AD311), 뒤에 ‘콘스탄티누스’와 불화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박해를 가했다. 그는 “투옥되어 있는 자들에 대하여, 누구라도 자비를 베풀어, 음식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 도한 고문당하는 자, 아사지경에 빠져 있는 자일지라도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명했다. 그리하여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고난에서 제외되지 못하게 하였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인에게 가하는 형벌을 줄 것이라고 함으로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냉담과 조소를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리키니우스’는 이 외에도 많은 악을 행하였으며,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고, 금과 은 등을 강탈하기 위한 각종 법률을 제정 공포했을 뿐만 아니라, 귀인 및 저명한 인사들까지도 추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의 부하들에게는 어떠한 악한 행동이라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 , 폭행 등을 일삼게 했다. 또한 교회의 감독들을 은밀히 살해케 하고, 도처의 교회를 파괴, 혹은 폐쇄케 했다. 그는 드디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하여, 스스로의 악한 양심으로 추론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콘스탄티누스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기도까지 못하게 했다. 그런가하면 그에게 아첨하는 총독들은 그러한 폭군을 오히려 만족케 하기 위하여, 감독 중 어떤 이들에게는 극악한 죄인과 같은 벌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악행도 한일 없는 사람들이, 마치 살인강도와 같이, 끌려가고, 어떤 이는 몸을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한 후, 물고기 밥으로써 바다 깊숙이 던져진바 되기도 하였다. 많은 신자들은 이러한 악행을 견디다 못하여, 산으로, 삼림으로, 들로, 사막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폭군 ‘리키니우스’는 피신하는 이들까지도 모두 잡아 죽일 목적으로, 더 세찬 박해를 일으키리라 계획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즉 ‘콘스탄티누스’와 불화하여 대립하던 그가 해상과 육상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패배하고(AD323), 다음해에 처형됨으로써, 그 일을 할 수 없게 된 때문이었다.(기독교 순교사에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통곡하는가? 이단자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영혼들을 몰살시키면서도, 과연 부끄러움의 통곡이 있는가? 우리의 행동은 ‘리키우스’와 무엇이 다르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308~324 재위)] 일리리아의 농부집안 출신으로 군대에서 출세해 곧 군인 출신 황제인 친구 갈레리우스에게 황제(Augustus)로 임명되었다(308. 11). 처음에는 서부지역 통치를 맡기로 했지만 이탈리아·아프리카·스페인이 막센티우스에게 점령당하고 콘스탄티누스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리게 된 후로는 판노니아를 통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그의 유럽 대륙 통치권을 넘겨받았으며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배다른 누이동생 콘스탄티아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플 동쪽에 있는 추룰룸에서 동부지역 황제 막시미누스를 패배시켜 아시아로 쫓아냈으며 막시미누스는 그곳에서 죽었다. 이리하여 제국의 절반인 동부지역을 전부 자신의 통치하에 두었다. 콘스탄티누스와 잠시 강화를 맺었으나 그뒤 판노니아·모이시아 속주를 빼앗겼다. 이후 10년 동안 전쟁이 없었지만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그는 군사력을 키우고 막대한 보물을 모았다. 그러나 324년 아드리아노플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져 테살로니카로 추방당한 뒤 이듬해 반란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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