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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콘”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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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헌철 작성일11-04-12 08:25 조회7,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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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콘”의 소명? “흑인신학과 흑인파워”와 해방의 흑인신학“을 출판하자 백인신학자들과 백인교회에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는 해방이 신학프로그램의 조직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흑인 해방의 신학은 단순히 백인들이 인종차별에 대한 반작용의신학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서, 해방, 화해, 폭력, 흑인종교와 흑인신학, 흑인의 고난 등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 ”제임스 콘(James H. Cone. 1938~)“의 글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으나 기도한다. “아프리카에서 백인 노예장사꾼들에 의해서 끌려와서 노예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조상들의 후손”이라고 설명한 그는 백인신학자들이 인종차별주의와 복음이 날카롭게 대치된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백인들의 억압 아래 있는 흑인들에게,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힘을 적용시켜 주는 것이 절박한 요청이 라고 생각에서 흑인신학, 곧 혁명의 신학을 낳게 된다. 그는 세계인이 주목했던 “마린루터 킹” 목사가암살을 목격하며, “과연 누구의 뜻에 따라 누구를 위해 죽음의 길을 가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킹”이 총탄에 쓰러지던 시절, 그 몸서리쳐지는 인종차별 속에서 학위를 받고도 교단에 서지 못했던 그는 “흑인해방신학자”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구스타프 구티에레즈”와 쌍벽을 이루었던 “환 루이 세군도(Jun L. Segundo. 예수회 신부)”는 하비 콕스, 칼 막스, 막스 웨버, 제임스 콘, 이 네 사람을 비교한 후 해석학적으로 완결된 사상은 “콘”밖에 없다고 극구 찬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현실주의 계보에 서 있는 “베넷” 등의 많은 백인 신학자들은 “콘”의 신학을 비판 하였고, 물론 한국의 신학자들도 “콘”을 비판하는 흐름에 있었으며, “칼 발트(Karl Barth)”에서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등 현대 신학자들은 흑인들이 노예화 되어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출처 = 신동아 1987년 1월호 별책부록) 그렇다면 “몰트만”이 누구인가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의 대부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가 추구했던 희망은 과연 누구의 뜻에 의한 누구를 위한 것 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잠식된 감이 있어 장로교회들마저도 그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 지금은 마틴루터 킹 목사의 생일(1960년 1월 21일)이 “미국 연방 공휴일”로 지정되었는가하며, “오바마”라는 미국의 흑인 대통령이 나오고, 재선에 도전한다고 하는 변화된 현실 앞에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한마디의 변명마저도 상실해 버린 한국의 교회는 세계인의 주목을 끌 정도로 성장을 이루어 왔으나 신학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에 아쉬움을 갖기에 흑인 신학의 연구와 함께 한국의 신학이 좀 더 활발하게 연구 하는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어 본다. “하나님 우리의 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하며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부르신 목적을 위하여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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