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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연혁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교회의 부흥의 기운은 1907년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놀라운 대 부흥의 역사는 장로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그 후 장로교회는 신앙뿐만 아니라 그 세력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특별히 억압받는 민족의 고통 속에서 교회의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1919년 3.1 운동에 이르러서는 장로교회가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에따른 일제의 보복과 억압으로 교회는 큰 시련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해외선교와 국내 전도활동 농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해오던 장로교회는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학적인 갈등들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자라왔으나 점차 외국의 새로운 신학사상과 방법론에 눈뜨고 귀국한 신진 신학자들에 의해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박형룡 박사는 당시 교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초기 50년 동안 정통신학교리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는 자유신학운동에 발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회안에 생겼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고등 비평과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의 대속, 재림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교리적 순수성을 지킨 총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 세계교회협의회) 와의 유대관계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다시 한번 분립의 진통을 겪게 된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대회에 대한 상이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WCC가 신학적으로 자유화되었기 때문에 탈퇴를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상반된 입장이 점점 가시화 되면서 총회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총회와 반대하는 총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1959년 WCC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이룩했고 통합측을 추종하는 교수와 학생들은 신학교를 분립하기에 이르렀다.

WCC를 반대하던 자들은 숭동교회에서 교단의 활동을 위하여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 측 교단과 합동하여 '합동측'으로서 이어 오다 그 후 여러가지 이유로 1962년 9월 21일 제 47회 총회 때 다시 총회가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합동측, 다른 하나는 호헌총회로 명칭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후 호헌총회는 1962년 11월 19일 대구 애향교회 예배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47회 총회는 '호헌총회'로 모였으며 1977년 3월 28일 14시 향산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측)과 대한예수교장로회(평신측)이 합동총회로 모여 교단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라 하기로 결의하였고, 이후 1984년 9월 20일 오후 7시 30분 성화교회(김석오 목사 시무)에서 개회된 호헌총회 제 69차 총회에서 호헌총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교단들이 많아짐에 따라 이에 혼선을 피하기 위하여 교단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로 결의하였다.

그후 23년 동안 나뉘어 있었으나 주후 2006년 5 월 18일 정오(12시)에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호헌"과 "합동총회"가 합동예배를 드림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이라 하기로 하였다